바이킹의 후예인 알레이 버크 제독은 태평양전쟁시 구축함 전대장으로서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존중한 선조치 후보고의 해상작전 교리를 개발하여 구축함 전투에서 이름을 떨쳤으며, 31노트의 버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니 미츠 제독이나 할시 제독보다 20살이나 젊었던 버크는 전후에 이 전쟁에서 명성을 떨친 가장 유명한 해군 영웅 중 한 명이 되었다. 1940년대 말 트루만 대통령이 3군 통합을 추진했을 때 발생한 정치적 사건과 논쟁 그리고 의회 청문회 도중 발생한 ‘제독들의 반란’에서 버크 제독은 핵심적인 위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 때문에 진급 대상에서 누락될 뻔 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장성으로 진급된 후 92명의 선임 제독들이 있었음에도 참모총장으로 발탁되어 전례 없이 6년간이나 재임하는 동안, 그는 항모 항공전력의 강화와 핵 추진시스템의 함정 도입을 강력하게 추진했으며, 폴라리스 탄도미사일 계획을 발전시킨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미국 정부는 현대 미국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버크 제독에게 전역한지 16년 지난 후(1977)에도 현역시절의 공적을 기려 미국의 최고 훈장인 자유훈장(Medal of Freedom)을 수여하였고, 1991년에는 이지스 구축함(DDG-51)을 알레이버크(Arleigh Burke)함으로 명명하여 생전에 자기 이름이 함명으로 명명된 최초의 장교라는 명예를 안겨주었다.
버크 제독은 순양함전단사령관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정전회담의 유엔군 대표로도 활약하였다. 또한 한국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하여 열악한 교육환경을 보고 미 해군 잡지에 기고문을 게재하여 2만여 권을 책이 기증되게 하였다. 전후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발상과 체결에 큰 영향을 주어 한미동맹의 실질적인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전역한 후에도 한국해군 발전에 큰 관심을 갖고 미해군 퇴역 구축함을 계속 인수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한국해군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은인이기도 하다. 전쟁과 군간 갈등의 격변기에 해군 생활을 했던 버크 제독의 참군인으로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